왔다네, 정말로
아무도 안 믿었던
사랑의 종말론 – 이찬혁 <멸종위기사랑> 中
뮤지션 이찬혁은 위처럼 사랑의 종말을 선언, 이 선언은 대중에 널리 회자, 제23회 한국대중음악상은 위 곡에 무려 3관왕의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올해의 노래, 최우수 팝 노래, 최우수 팝 음반)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사랑, 대체 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멸종을 막고 사랑을 되살릴 방법은 무엇일까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통해 알아봅시다.
흔한 오해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외따로 떨어져 있던 이들이 운명처럼 한 시간, 한 공간에 조우합니다. 둘은 한눈에 반합니다. 서로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아웃포커싱. 짜릿한 감정에 도파민이 폭발합니다. 같은 취향, 같은 습관 등 공통점을 하나둘 맞춰보며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듯 기뻐합니다. 한동안 이들은 마치 한 몸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지요, ‘나는 사랑에 빠졌어.’
저자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도취적 합일’일 뿐입니다. 도취적 합일은 일시적이며 강렬합니다. 때론 폭력적이고, 대상과 하나가 되려는 일입니다. 또 수동의 경험이며 대상과 둘만의 세계 속에 매몰됩니다. 꼭 위의 예시처럼 사람 간의 일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은 얼마든지 물질, 사회, 세상, 신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닌 머묾입니다. 사랑은 같음이 아닌 개성의 유지입니다. 사랑은 특정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닌 능력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평생을 걸쳐 갈고 닦고 훈련해야 할 기술(art)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용서할 일이지 상대를 평가하고 단죄할 일 또한 아니지요. 소유할 수도 없고 오로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할 뿐입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므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스스로가 준비되었다면, 사람이든 세상이든 신이든 모두 동시에 사랑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네 가지 요소로 보살핌, 책임, 존중, 지식을 제시합니다.
사랑의 종말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갈등을 떠올려봅시다. 세대 갈등, 남녀 갈등, 국가 간의 전쟁. 사실 꼭 이렇게 큰 범주에서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당장 여러분이 최근 가족, 연인, 동료, 친구와 겪었던 다툼을 떠올려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알고 보면 서로가 서로를 오로지 합일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나요? 과연 우리는 서로 사랑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까요?
갈등은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이제는 효용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벌어집니다. 이는 곧 사랑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날마다 나라 안팎으로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혐오와 분열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멸종위기사랑>이 탄생하고, 회자되고, 인정받는 일은 단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술은 어김없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 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할부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p. 15)
사랑의 종말은 물질주의의 확산과 그에 따른 소유적 태도가 만연한 결과입니다. 일치적 합일의 특징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죠. 대상의 문제, 일시적인 강렬함, 도취적 감정 등등. 바로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고자 욕망할 때, 혹은 그것을 소유했을 때의 경험과 닮아 있습니다.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이 지나치다 못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할 목적이 아닌 소유욕을 충족시킬 도구마냥 여기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이 고독을 견뎌낼 줄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혼자인 상태를 견뎌낸다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는 의미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한 형태(자기애)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현대인은 그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물질을, 타인을, 세계를, 신을 게걸스레 탐합니다. 그러나 탐욕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처만을 남길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오롯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 내어 고독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허점투성이의 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등 두드려주고, 함께 눈물 흘려주고, 마침내 어깨 들썩임이 잦아들면 함께 손 잡고 세상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때 타인도, 세상도, 신도 진정 올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된 내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치며
위에서 언급했듯 사랑은 우리가 평생 갈고 닦아야 할 기술(art)입니다. 고작 서평 하나 읽었다고 완전히 익힐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기술》을 인생 책으로 꼽아 재독에 삼독을 거듭하는 필자마저도 언제나 100점짜리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세상을 비관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사랑의 기술》을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아 다시 일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장합니다. 위에 소개해드린 내용 외에도 《사랑의 기술》에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도움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사랑. 자기애, 형제애, 인류애, 신에 대한 사랑으로 세분화한 사랑의 다양한 모습. 또, 사랑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데에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 등 말입니다.
Stop people, Stop letting this world depraved (사람들, 이 세상의 타락을 막아야해)
Revive it somehow, Revive it somehow (어떻게든 사랑을 되살려야 해, 어떻게든)
-이찬혁 <멸종위기사랑> 中
저의 이 작은 리뷰 하나만으로 혐오와 분열의 시대를 구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를 계기로 여러분이 《사랑의 기술》에 관심을 갖고, 직접 책을 읽어보고, 마음 안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이상의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멸종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