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건네는 해방의 열쇠

2024. 11. 08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Scroll

저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은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의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불행히도 나치의 강제 수용소 수감 생활을 겪어야 했는데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강제 수용소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경정신과 의사로서의 통찰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쥐」(아트 슈피겔만 저)와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쥐」는 강제 수용소의 참상과 생존자가 해방 이후에도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룩진 삶을 살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그리는 반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런 체험의 명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27쪽)을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제1부에서는 수용소에서의 구체적인 체험과 인간 본성에의 깨달음을 에피소드별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해당하는 제2부와 3부에서는 전반부의 내용을 토대로 저자가 창시한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지요. 그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삶은 선택의 결과이고 우리는 각자의 삶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이 아니다. (109쪽)

또, 충분히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110쪽) 있는 한편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같은 쪽)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시련의 의미를 이전과는 다르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으레 사람들은 시련을 삶에서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일종의 징벌로 여기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면, 시련은 다름 아닌 그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과제일 뿐이며 그 선택의 과정 속에는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126쪽)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는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저마다의 시련을 겪어 왔고 또 앞으로 펼쳐질 생 또한 시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 (216쪽)

따라서 현재 어떠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수치로 전환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 (175쪽)

입니다.

끝으로,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련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태도를 함양하는 데에 초점을 둡니다. 로고테라피는 삶과 시련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말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 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156쪽)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장단점이 뚜렷한 책입니다. 우선 장점으로는, 읽기에 편합니다. 저자가 신경의학과 의사이고, 다루는 소재가 암울한 수용소 생활 및 생소한 로고테라피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책은 확실히 쉬운 문체로 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아울러, 전반부의 에피소드들 뿐 아니라 후반부의 중요 개념들 또한 각각 네 페이지 내외의 짧은 분량으로 쓰였기 때문에 확실히 독자의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내용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데요, 제2부와 내용이 비슷한 제3부가 ─ 그 분량이 2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 정말 필요했는가 의문이 듭니다. 게다가 주요 내용들이 제1부에서 제3부까지 중구난방으로 산재해 있어 복잡하게 머릿속을 뱅뱅 맴돌고 그 맥락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가치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것 또한 아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162쪽)면서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 (중략) 돈 (중략) 성적 탐닉에서 보상을 찾으려고’(161쪽)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권력이나 돈, 성적 탐닉은 삶의 의미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전제로 하는 한편, 책 중간중간 사랑이나 종교 등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해 혼란을 야기합니다. 추구해야 하는 삶의 가치나 방향성이 어떠한 것에 기초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시했다면 좋았겠지만, 저자가 철학자나 신학자가 아닌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어판 제목은 책의 핵심 메시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책의 원제는 「Man’s Searching For Meaning」인데, 번역하자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가 되겠지요. 원제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교적 선명히 반영하고 있는 반면, 한국판 제목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의 수용소 체험에 방점을 찍는 데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물론, 단어 ‘죽음’과 ‘수용소’가 불러일으키는 자극성에 기대어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판매고를 높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제목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 대부분은 당시의 극단적인 굶주림, 폭력, 강제 노동, 대량 학살 등을 겪지 않아도 되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가 각자 저마다의 ‘수용소’ 안에서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용소’라는 것은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일 수도, 지독한 고독일 수도 있고, 또 도저히 잊히지 않는 끔찍한 과거일 수도 있지요. 그 무엇이 됐든 간에 ‘수용소’에서 고통받는 자는 모두 수감자입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말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시련을 극복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그 과정 속에 있다고요. 또 그렇기에 모든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우리는 책임감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겨울이 너무 혹독하면 추위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기도 한 법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 이 책이 여러분에게 겨울 나는 법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얼어붙은 문을 녹이고 여러분 손에 해방의 열쇠를 꼭 쥐여 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