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학생이던 르네 릴케가 정말 시인이 됐군.”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이하 카푸스)에게 학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시 유명 시인의 반열에 오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하 릴케). 목사님이 들려주는 학창 시절의 릴케 이야기들은 카푸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시인 지망생 카푸스는 편지로 자신의 습작을 릴케에게 보내 평가받고자 결심합니다. 성공한 덕후 카푸스는 릴케와 무려 5년여간 편지를 주고받는데요, 친절한 릴케는 이 젊은 시인에게 따뜻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중 열 통을 엮어 만든 책이 바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책의 제목, 그리고 위의 배경 이야기를 염두에 두면, 어려운 시창법이나 출판계의 현실 등과 같이 골치 아픈 내용들만 가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릴케는 창작자로서뿐만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어떻게 하면 삶을 충만히 살아갈 수 있을지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적인 분류와 해당하는 편지글의 인용문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첫째, 창작자로서의 조언. 릴케는 말합니다.
일반적인 주제보다는 당신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시상을 발견하세요. (…) 당신의 일상이 빈약하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을 탓하지는 마세요. (…) 진정한 창조자에게 빈곤한 일상이나 결핍된 시상, 흥미롭지 않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6쪽)
제가 카푸스였다면 머리가 얼얼했을 것 같아요. 정신이 바짝 드는 충고가 아닌가요? 게다가 실용적이기까지 합니다.
둘째, 현실과 이상의 조화. 어느 편지에서 카푸스는 자신의 군인이라는 직업이 시인으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이에 릴케는 답합니다.
당신의 직업이 힘들고 당신의 성향과 반대되는 일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 모든 직업이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직업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광범위해서 진정한 삶을 안겨주는 위대한 존재들과 관련된 직업은 없습니다. (68쪽)
예술가라면 응당 ‘당신의 영혼을 좀먹는 그런 일 따위는 당장 때려치우고, 하루라도 빨리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라며 일갈할 것만 같은데, 아주 의외입니다. 릴케는 이상이란 우리 살아가는 현실 속에 있음을 이미 깨우친 사람인 것입니다.
셋째,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 카푸스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또한 털어놓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가까운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는 문제 말이지요. 저를 포함해 여러분도 한 번쯤은 아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왠지 더 자주 겪게 되는 일이지요? 이에 릴케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 살펴봅시다.
당신과 가까운 존재가 멀리 느껴진다는 말은 당신 주변이 이미 별 아래에 이를 정도로 광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자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51쪽)
그에 의하면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닙니다. 그저 또 다른 기쁨의 그림자일 뿐이지요.
넷째, 고독과 사랑. 릴케는 시인으로서, 또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고독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고독과 진부하고 값싼 유대감을 바꾸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 하지만 이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는 순간입니다. (…)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몇 시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는 상태, 이런 상태에 도달해야 합니다. (55쪽)
사랑이란 그 안에서 두 사람의 고독이 서로 보호하고 가까이 서서 인사하는 것입니다. (79쪽)
여기서 말하는 고독이란 ‘외로움’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바로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 그리고 그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의미하죠. SNS나 소모적인 연애로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됨으로써 무료함에서 벗어나려 분투하면서도, 어김없이 공허함에 시달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조언입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덕후 카푸스는 정말 등단하여 유명 시인이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그가 시인으로 등단했는지, 아니면 평범한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가 릴케와 편지를 주고받은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카푸스가 릴케의 편지를 통해 풍부한 삶을 누리고 넓은 마음의 어른으로 성장했으리라는 점입니다. 만약 릴케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기뻐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설령 그가 직업 시인으로 등단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인이 쓴 글답게 문장들이 아주 아름답고 유려합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도 좋지만, 문장 자체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있어요. 창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간단한 표현들로, 마치 친절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꼭꼭 씹어 떠먹여주는 듯한 문체로 쓰인 책입니다. 따라서 시에 익숙하지 않은 예비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쉽고 유익할 거예요. 시에 문외한이었던 저도 이렇듯 재미있게 읽었는걸요?
시를 잘 읽고 싶어서, 더 나아가 나도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작은 희망을 찾기 위해 이 책을 골라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을 일대일 과외 선생님으로 초빙하는 느낌으로요. 역시 릴케는 정말 유능한 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에게 시를 넘어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따뜻한 조언과 격려에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지나간 날들을 긍정하게 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마침내 책장을 덮었을 때, 저는 여전히 젊었고, 세상은 눈부시고, 그 속에 또 한 명의 시인이 서 있었습니다.
예비 독자들께서도 마음속 젊은 시인에게 이 릴케의 편지들을 읽어 주세요. 여러분의 삶이 곧 시가 되어 흐를 테니.